【崔-시론(詩論)】재미로 읽는 전쟁 이야기- '살라미스 해전'편

최승범 | 기사입력 2019/01/17 [19:49]

【崔-시론(詩論)】재미로 읽는 전쟁 이야기- '살라미스 해전'편

최승범 | 입력 : 2019/01/17 [19:49]

 

▲  세계 4대 해전사로 기록된 '살라미스해전'   ©



 

살라미스 해전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한 페르시아는 패배를 설욕하고자 다시 치밀하게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페르시아는 수많은 병사와 물자를 모으고, 대규모 함대를 구성하고, 다리를 놓고, 운하를 만들어 이동과 보급 경로를 확보하는 등 그리스 원정을 철저하게 준비하였다. 전쟁을 준비하는 동안에 다리우스 대왕이 사망하고 크세르크세스(Xerxes)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리스도 페르시아가 다시 침공해 올 것이라 예상하고 전쟁에 대비했다. 특히 그리스 남부 도시국가들은 헬레네 동맹(Hellenic League)을 결성하고 연합하여 페르시아에 대항하고자 했다.

 

헬레네 동맹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주도하였는데 스파르타가 동맹군의 지휘를 맡았다. 즉, 동맹군의 총사령관은 스파르타에서 맡은 것이었다. 이것은 스파르타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스파르타의 상무 정신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였다.

 

스파르타로 하여금 전쟁을 총지휘하게 하도록 한 것은 전쟁지휘의 단일화를 이룩한 것이다.

 

오늘날 군사학에서는 일련의 전쟁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지휘통일의 원칙'이다.

 

스파르타가 전쟁을 총지휘하게 된 것은 이 원칙이 제대로 적용된 사례라 볼 수 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군은 전투에서의 효율성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아테네도 페르시아의 복수전은 당연히 아테네에 집중할 것이라 예상하고 나름대로 치밀하게 전쟁 준비를 한다.

 

특히 아테네의 실권자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는 장차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바다에서 승부, 즉 해전에서의 승리가 전쟁의 향방을 가를 것이라 예상하고 해군력 강화에 온 힘을 쏟는다.

 

기원전 486년에 그는 의회를 설득하여 100척의 함선을 건조하게 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으로 인하여 아테네는 기원전 480년대 말엽에는 200척의 함선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는 전쟁이 발발하면 육지 전투에서의 승패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으며 전투력의 핵심은 '밀집 중장보병'이었다.

 

그러한 시대에 해양 방위전략에 중점을 두고 전쟁 준비를 했다는 것은 장차 예상되는 전쟁의 전략적 본질을 예견한 테미스토클레스의 뛰어난 통찰력과 혜안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기원전 484년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기술자 하르팔로스(Harpalos)를 고용하여 아비도스와 세스토스 사이의 헬레스폰트 해협에 다리를 놓았다.

 

그는 300척 이상의 함선을 닻줄로 연결해 해협에 배를 두 줄로 세운 다음 그 위에 나무로 길을 깔았다. 그런 후 기원전 480년에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북부로 진격을 시작했다.

 

제3차 전쟁이 개시된 것이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페르시아군은 약 16만 명의 인원과 1,207척의 전함, 3,000척의 수송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육지에서의 첫 대규모 전투는 테르모필레 지역에서 치열하게 치러졌다.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수적 우위를 극복하기 위해 테르모필레의 좁은 협곡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한 것이었다. 테르모필레의 통로는 어느 부분에서는 겨우 마차 한 대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 매우 좁은 협곡이었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Leonidas)는 7,000명의 장갑보병을 이끌고 그 길목에 진을 쳤다. 레오니다스는 이틀 동안 페르시아의 공격을 잘 저지했다. 첫날 전투에서 페르시아는 1만 명의 병력을 잃어버렸고, 둘째 날에도 그리스군은 페르시아군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다.

 

그러자 크세르크스는 협곡이 너무 좁아서 대규모 병력이 한꺼번에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정면 공격을 포기하고 후방으로 돌아가서 그리스군의 배후를 공격하기로 한다.

 

그는 테르모필레의 지형을 잘 아는 그리스인을 매수해서 그리스군의 후방을 공격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알아냈다. 그런 다음 페르시아군은 야간에 은밀히 이동하여 후방으로 돌아가서 새벽에 그리스군의 배후를 공격하였다.

 

불의에 후방 기습 공격을 받은 그리스 연합군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레오니다스는 정예군을 보호하기 위해 즉각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은 스파르타 전사 300명과 함께 남아서 페르시아군에 끝까지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Leonidas)가 장렬하게 전투하다가 전사한 ' 테르모필레 전투'(=영화 300의 한 장면) ©



2014년에 개봉한 ‘영화 300’은 이 '테르모필레 전투'를 배경으로 제작된 것이다. 페르시아는 병사 2만 명을 잃는 만만치 않은 대가를 치른 후에야 테르모필레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한편 바다에서는 아르테이시온 곶 일대에서 양 진영이 일대 격전을 치른다. 이틀 동안의 해전에서 승부는 나지 않았지만 페르시아군의 우세였다. 그런데 그리스군에게 테르모필레에서의 전투에서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리스 해군은 후퇴하여 살라미스 섬 부근으로 철수한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승리한 페르시아는 신속하게 남하하여 9일 만에 아테네시를 점령하고 약탈하였다. 이제 함대만이 그리스를 구할 수 있었다.

 

그리스 연합해군의 총사령관인 스파르타 에우리비아데스(Eurybiades)는 지휘관 회의를 개최하였다. 회의에서는 치열한 격론이 벌어지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 해협을 결전의 장소로 정하고 에우리비아데스를 설득하였다. 그는 살라미스의 좁은 바다가 기동성은 우수하나 수적으로 열세인 그리스 함대에게는 더없이 이상적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하지만 에우리비아데스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테미스토클레스는 대단히 대담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은 페르시아로 하여금 그리스 함대를 공격하도록 유인하는 것이었다.

 

그는 크세르크스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신은 페르시아에 투항할 것이며 그리스가 현 진지를 포기하기 이전에 공격한다면 살라미스에서 그리스 함대를 함정 속에 몰아넣을 수 있으리라고 말하였다.

 

크세르크스는 이를 믿었고 페르시아군은 곧 함정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곧바로 함대를 살라미스로 진격시켰다. 이제 그리스군도 어쩔 수 없이 '살라미스 해협'에서 결전을 치르는 방법밖에 없었다.

 

페르시아가 먼저 전투를 개시했다. 해협이 좁아서 페르시아군은 3중 전열을 2열 종대로 바꿔야 했는데 그로 인해 함대가 너무 밀집해 져 버렸다. 그 순간에 그리스 함대가 공격해왔다.

 

그리스 함선은 페르시아 함선의 노를 부러뜨려 통제 불능 상태로 만든 다음 들이받았다. 때로는 페르시아 함선의 갑판 위로 올라가 육박전을 벌이기도 했다. 결정적인 작전을 수행한 것은 아테네군이었다.

 

아테네군은 해안선에 바짝 붙어 페르시아의 우측으로 돌아간 다음, 적진의 중앙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페르시아의 함대는 당황해서 점점 더 혼란에 빠졌다.

 

처음 중앙에서의 격전은 막상막하였고, 그리스 함대의 우측은 열세로 보였다. 그러나 하루 종일 치열한 격전을 치른 후에는 그리스군의 승세로 점점 굳어져 갔다. 아

 

아테네군은 적의 후미 좌측까지 함락시킬 기세였다. 결국 페르시아 함대가 견디지 못하고 후퇴했다. 그리스군의 대승이었다.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는 200척의 함선이 격침되었으나 그리스는 불과 46척의 손실만이 있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의 승리요인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그리스군은 '지형의 이점을 잘 활용'했다. 살라미스 수로는 협소하기 때문에 대규모 함대가 기동하기에는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페르시아의 대함대는 좁은 해협에서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던 것이었다.

 

두 번째는 '기만작전의 성공'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크세르크스에게 허위로 편지를 보냈는데 페르시아군은 이를 믿고 기동하여 참패를 당하였다.

 

세 번째는 그리스군의 '철저한 전쟁 준비'였다. 그리스는 장차 페르시아와의 전투는 해전 위주로 전개될 것을 예상하고 시의적절하게 대함대를 건조하였는데 그 예상이 바로 적중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군사력의 절대적 열세를 '지휘관의 탁월한 능력'으로 극복한 것을 들 수 있겠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적 혜안과 기만작전 방책, 적합한 결전 장소의 선택 등 그의 탁월한 능력 없이는 결코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살라미스 해전'은 영국 하워드 제독의 칼레 해전(1598년), 영국 넬슨 제독의 트라팔가 해전(1805년),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1529년)과 더불어 '세계 4대 해전'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 육군은 플라타이아이에서 그리스 연합군과 다시 한번 결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수적 열세를 딛고 또다시 승리를 거두어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완전히 끝냈다.

 

이 전쟁으로 아테네는 에게해의 맹주로 떠올랐으며 연안의 전략적 요충지를 모두 장악하여 흑해를 오가는 길까지 확보했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와 페르시아와의 3차례에 걸친 오랜 전쟁에서 그리스가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찬란한 그리스 문명이 꽃피기 시작되는 시기가 도래된 것이었다.(계속)

 

최승범 (예) 육군 준장

 

(미디어저널 군사전문 논설위원/합동군사대학 명예교수/한국열린사이버대학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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