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시론(詩論)】 재미로 읽는 전쟁 이야기

최승범 | 기사입력 2018/12/12 [04:50]

【崔-시론(詩論)】 재미로 읽는 전쟁 이야기

최승범 | 입력 : 2018/12/12 [04:50]

 

▲  아시리아제국 영토 (위키백과 참조) ©


 

아시리아는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7세기까지 중동의 메소포타미아에서 크게 번영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북부에 있는 지역이다.

 

아시리아의 첫 민족은 기원전 2500년경 셈족의 2차 이동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이다.

 

아시리아인들은 이민족에 둘러싸인 특수한 환경 탓에 항상 적대적인 민족의 위협과 침략을 받았으며 땅과 자원도 부족했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그들은 점차 호전적으로 변했고 계속 새로운 지역으로 진출해야만 이미 가진 것을 지킬 수 있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이들은 로마가 등장할 때까지 가장 진보된 전쟁 기술을 가진 거대한 군사국가였다.

 

 아시리아는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쇠약해지자 힘의 공백이 생긴 틈을 타서 기원전 1276~1233년에 급성장했다.

 

그러다가 티클라트필라제르(Tiglathpileser) 1세 때 아주 강해져서 히타이트 제국의 광대한 지역을 수중에 넣었고, 지중해 연안까지 진출했으며 바빌로니아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당시 내란과 아람 부족의 공격으로 세력이 붕괴되어 이후 200년 동안 힘을 쓰지 못했다.

 

아시리아가 다시 힘을 되찾기 시작한 것은 아다드 니라리(Adad-Nirari) 2세 때였다.

 

그는 바빌로니아를 침공했고, 서북부 평야와 고원 부족들 점령했다.

 

그 후 100년 동안 아시리아의 왕들은 철저한 정복이라는 무자비한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아시리아의 영토 확장 전쟁은 상상을 초월한 살육전쟁으로 점철되었다.

 

특히 아수르나시르팔 2세는 연이은 원정 전쟁에서 저항하는 도시는 완전히 파괴하고 남자들은 창에 꿰어 죽이고, 살갗을 벗기는 등 잔혹하게 죽였으며,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처분하는가 하면, 백기 투항한 도시의 시민들은 이주시켜 아예 이들 민족정신의 혼을 말살시키고자 했다.

 

얼마나 잔인하게 파괴하고 살육을 했는지는 다음의 기록에서 보면 알 수 있다.

 

  “ ....나는 그 도시의 문을 향해 기둥을 세우고 반란한 모든 장들의 껍질을 벗겼고 그들의 껍질을 기둥에 둘렀다. 약간은 기둥 안에 둘러쌌고, 약간은 말뚝 위 기둥에 꿰뚫고, 나머지는 기둥 주위로 말뚝에 매었다. 내 나라의 국경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가죽을 벗겼고, 나는 그들 가죽을 벽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나는 장교들, 반란한 황실 장교의 수족을 잘랐다.....”(전쟁의 기원에서, 아더훼릴 지음 / 이춘근 옮김)

 

 '아시리아의 이리'라는 악명을 얻으면서 공포의 대상이 된 아수르나시르팔 2세는 전차와 보병 이외에 처음으로 기병을 도입하고 군사기술의 획기적 발전을 이루어 북방과 동방으로 정복지를 넓혔다. 그는 직접 정복 전쟁에 나서 시리아, 페니키아 등 여러 도시를 복속시켰다.

 

아시리아는 정복된 지방을 통치하기 위해서 왕의 직접 통제하에 중앙에 강력한 예비병력을 보유하였다.

 

주요 전략 요충지에 수비부대를 배치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중앙에 막강한 부대를 보유하고 있다가 유사시 병력을 보내어 외부 침략 세력을 격퇴하거나 내부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외적인 안전은 물론 내적인 안정까지 도모하는 전략을 추구하였다.

 

또한 강력한 테러정책을 채택하여 내부 안정을 도모하였는데, 따라서 반란 등 반역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고 강력한 군사보복을 가하였다.  

 

아시리아는 항복한 부족들에게도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모든 땅을 약탈했고, 아시리아의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잔혹하게 집단 이주시키는 것을 정식 정책으로 삼았다.

 

그것은 아시리아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현실적인 정책이었다.

 

아시리아는 거칠고 황폐한 지역에 위치해 있어서 궁핍하고 보잘것없이 생존하느냐 아니면 정복으로 부유해지느냐의 양자택일만 가능했던 것이었다.

 

아시리아는 철기시대 최초의 거대한 군사 강국이었다.

 

그들의 무기는 이전 어느 시대보다 더 강하고 예리하였으며 기원전 1000년 직전에는 기병을 최초로 운용하였다.

 

기병을 최초로 운용한 군대였지만 전차병은 육군의 엘리트 부대로서의 존재를 계속 유지하였다.

 

그리고 비록 중앙에 상비군이 존재했지만 각 지방으로부터의 징집제도도 병행되었으며 전쟁 발발 시에는 각 지방에서 병력을 차출하였다.

 

군대는 중보병과 경보병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통합군으로서 창병, 궁병, 돌팔매병, 돌격부대와 공병대로 구성되었다.

 

아시리아의 병력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약 10 ~20만 병력을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기원전 714년 사르곤(Sargon) 2세는 북동부 국경지대에 있던 강력한 우라투(Uratu) 왕국에 대한 정복 전쟁을 벌인다.

 

티그리스강을 도하하여 마네이어 왕국에 도달했을 때 마네이어 왕은 싸우지도 않은 채 항복하였고, 아르메니아 왕은 수도를 포기한 채 북쪽으로 도망갔다.

 

사르곤 2세는 점령한 지역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궁극적인 목표였던 우라투 왕국의 우르사 왕과의 전투에서 사르곤 왕은 직접 전차와 기병을 이끌고 전투를 벌였다.

 

그는 결정적인 전투에서 종대 대형으로 공격하여 적 부대를 직접 강타하였다.

 

이에 우르사 왕은 자신의 전차를 포기하고 말을 탄 채 도망쳤다. 사르곤 왕은 우르사 군을 격퇴하고 역시 무자비한 파괴를 일삼는다.

 

아시리아군은 전투 시에 전술적 유연성이 뛰어났다.

 

적진 깊숙이 수백 마일이나 들어간 곳에서 행해지는 전투에서 강을 건너고 산을 넘었던 그의 군대는 보급로를 유지하면서 대규모의 전투를 감행하였다.

 

요새화된 지역에 포위 공격을 가하였고 시골과 도시들을 파괴하였다.

 

아시리아 군은 교활하고 심술 사나운 지도력을 갖춘 군대였으며 당대의 어떤 국가의 군대보다 훌륭하게 조직된 군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시리아는 아수르바니팔(Assurbanipal) 왕 사후에 후계자를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어 국가의 힘이 약해졌고 그 틈을 타서 기원전 614년에 바빌로니아와 메디아가 연합하여 아시리아를 공격했다.

 

기원전 612년에는 스키타이, 메디아 및 바빌로니아 연합군이 수도인 니네베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이로써 약 600년 동안 근동 전체에 걸쳐서 끊임없이 무자비하게 전쟁을 일으켰고 전투에서는 항상 승리만 거듭했던 아시리아 제국은 멸망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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